지리산 둘레길 3구간(20.7km)을 끝내고 진주형님집에서 또하루를 보낸다.
어쩌다 보니 2박3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오히려 여유가 있는것만큼 사실이지만
진수 형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자주 오는 촌집도 아니지만
촌집에 온이상 약치고 풀베고, 청소 등 정리를 해야 하는데
나의 저녁 근무로 쉬어야할 시간에 일찍 출발해야 한다는 부담 또한 없지 않다는도 잘 안다.
하지만 지리산 둘레길이라는 공통적은 분모 때문에 벌써 매달 오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고 또 올때 마다 맛있는 음식 또한 고향이라는 말로 접대를 받는격이니 이 또한 감사한일이다.
7월 4일............
06시 못된시간이다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동네 한바퀴.....
그러니 무슨 방송사의 프로그램 이름같다 라며 일어난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졌는데...
사실 어제 저녁 울산 가는길에 함양 상림을 둘러보고 가기로 했었는데 ....
아무래도 못다한 촌집 정리하고 가려면 둘러보지 못할것같은 생각이다.
누가 그러더라
가까이 있으면 아무리 명승지라도 잘 가지 못한다는....
하여 혼자라도 둘러 오기로 하고 출발한다.
도천면 병곡리..........
상림숲 들머리 물레방아가 있는곳까지는 약 1.3km..........
20분 거리다.
이른 아침이라 한적한 도로며 바람이 불어 시원해서 참 좋다.
참 좋은 아침이다.
어제저녁 제법 많은 비가 왔는지 위천 의 물이 황톳물로 바꿨다.
그리고 물소리도 요란하고 세차게 흐르는 모습이다.
06시 05분........
함양 상림숲이다.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면적은 21ha라고 하는데 1ha는 3025평이니 약 60,000평이다.
갈참, 졸참,상수리, 서어나무, 개암나무등 120여종의 활엽수등 20,000여그루의 수종으로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상림은 신라 진성여왕때 함양군수로 부임한 최치원 선생이 재난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자는 차원으로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당시는 위천이 함양시내로 흐로고 있어 홍수가 빈번 했었는데 이런 피해을 막기 위해 강물을 돌리고 둑옆에 나무를 심었던게 상림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숲을 대관림이라고 이름지어 잘 보호하였으므로 홍수의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후 중간부분이 파괴되어 지금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하림구간은 취락의 형성으로 훼손되어 몇 그루의 나무만 서 있어 그 흔적만 남아있고 옛날 그대로의 숲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상림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상림숲 지도
위천
방향은
물레방아를 지나 맨발 산책길로 들어선다.
상림 숲에 뱀, 개구리, 개미를 몰아 냈다고...........
설에 의하면
최치원은 신라 헌강왕 원년(857년)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설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문창이라는 곳의 영으로 부임하면서 치원을 잉태한 지 넉달만에 금돼지로부터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육개월만에 최치원을 낳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차마 이 아기를 기를 수가 없어서 치원을 내다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무인도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데
밤만 되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서 젖을 먹여 키웠고 낮이 되면 오색 무지개가 찬연한 하늘에서 큰 학 한 마리가 날아와서 치원을 품고 있었으므로 짐승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있어 아무 탈없이 자라나게 되었다.
최치원이 무인도에서 책을 읽을 때 소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중국의 황제 귀에까지 들렸다고 하는데...
이에 중국황제는 신라국에 학사를 보내어 시로써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치원은 12세 되는 해 당나라에 유학을 하여 명성을 떨쳤고 6년만인 18세 되던 해에는 중국에서 당당하게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중국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황소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관군 총지휘관 고변의 비서관이 되어 종사관의 자격으로 황소격문을 써서 유명하다.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충격적이고도 감동적이라서 놀란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결국 황소가 반란의 명분을 찾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 격문이다.
그는 28세 되던 해(885년) 당나라 헌종 황제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는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조그마한 고을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자원하여 전북 태인과 정읍, 충남의 서산을 거쳐 천령군(지금의 함양군)태수로 부임하였다.
그의 치적 중에서 상림은 함양을 대표하여 내세울 수 있는 곳이다.
풍치가 아름답고 지방민의 휴식처로 알맞은 곳이며 많은 수종이 있다.
최치원 자신이 손수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활엽수를 캐어다가 풍수해를 막기 위한 방제와 방풍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상림공원의 신도비를 읽어 보면 신라말 함양의 태수로서 그 공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같은 해충이 전혀 없다고 ..............
그런데
그 까닭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은 홀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 나갔으며 돌아와서는 반드시 알려 근심하시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어머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고 어머님의 근심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아 어머니의 뜻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하늘이 낸 효자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님에 대한 불편은 조금도 없게 해 드릴려고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님은 혼자서 바람을 쏘일겸 상림 숲에 산책을 나가서 풀숲에 않아 놀다가 뱀을 보고 깜작 놀랐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숲에서 뱀을 보고 놀란 이야기를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은 어머니에게 송구함을 금치 못하여 상림 숲으로 달려가서 숲을 향해 이후로는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같은 모든 해충은 일체 없어져라.
그리고 다시는 이숲에 들지 말라. 고 주문을 외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최치원의 지극한 효성으로 인한 주문 때문에 모든 해충이 사라지고 모여들지를 못한다고 한다.
최치원의 지극한효성은 하늘도 감동하고 땅도 감동하고 심지어 하찮은 미물도 감동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니 그를 하늘이 낸 효자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최치원이 상림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 어디엔가 나무 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두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숲을 만들고 떠나면서 상림 숲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고 숲속에 설죽이 침범하면 내가 죽을 줄 알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 뱀은 아직 나타나지 않지만 가끔 개미가 보이고 숲속에는 설죽이 많이 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는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라고들 한다.
믿거나 말거나..............
마당바위
큰마음의 어머니가 되라는 바위이다.
문창후최선생신도비
신라 진성여왕(887-897)때 문창후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로 부임하여 읍민을 다스릴 때
읍성을 지나 흐르던 뇌계(위천수)가 홍수로 인한 농토와 가옥이 유실되고 군민의 생활이 궁핍함을 살펴보고 치수를 위하여 상림에서 하림까지 둑을 쌓고 물을 돌려 조림을 함으로써 민심을 바르게 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23년에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비라고 한다.
사운정
1906년 (高宗 46)에 경상도 유림과 정삼품(정3품) 박정규, 김득창이 문창후 고운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여 모현정이라 불렀으나 고운 선생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사운정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식수
산책길
사랑나무라고 되어 있다.
개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같은 곳에서 자라고 있는데 안내에는 연리목이니 사랑나무로 소개 하고 있다.
연리목이란 서로다른 줄기가 이러져 한몸으로 지라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이은리석불
함양읍 이은리 냇가에서 1950년경에 출토된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불상 주위 약 300m 지점에 망가사(望迦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절의 유물로 추정된다고.....
180cm의 높이의 석불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이 불상은 현재 두손이 떨어지고 없다.
머리부분은 단정하며 두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다,
머리는 소발(燒髮)이며, 원만한 얼굴은 다소 토속적인 표정도 엿보인다는 설명이다.
화수정
파평 윤씨 종중(宗中)에서 집안끼리 모여서 우의와 정담을 나누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으며, 상림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함화루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망악루(望嶽樓)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명칭은 남문에서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까닭에 이름하였다고 한다.
1932년 고적보존회의 대표였던 함양읍 죽곡리 거주 송계 노덕영(盧悳泳)이 사재를 들여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여 함화루(咸化樓)라고 개칭 하였다고 한다.
어울리지 않은 머루터널
함양 읍내이자 상림 들머리이다.
이런게 왜 필요한것이지....
타워맨이라고...........
중세 유럽의 교회건물을 의인화한 것으로 덴마크 듀오 작가의 란디 & 카트린 작품이라고....
그런데 이게 상림라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최치원 역사 공원
고사리 모습을 형상화
금호미다리
고운 최선생은 상림숲의 조림을 마치고 숲속어디엔가 나뭇가지에 조림하던 금호미를 걸어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매회 열리는 천령문화제 행사에는 필히 금호미 찾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고 여기 금호미 다리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 근처 어딘가에 금호미를 걸어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를 공원에 세워 두었다.
최치원 역사 공원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상림의 주변을 개발중이다.
지난 봄에는 보리가 자라더만 언제 베어버리고 꽃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군데 군데 연밭을 만들었지만 아직인지 모르지만 엉망이다.
부여 궁남지를 벤쳐마킹하는것도 괜찮을터...................
어째튼 함보자
이곳 수경식물은아이디어가 참 좋다는생각이다.
하지만 물이 너무 지저분하다.
고여있는물이 썩기 마련일터............
물 빛이 좀 그렇다.
형상수를 구해다 이식한것 꺼지는 좋은데 자리가 이곳은아닌데 싶다.
또 연밭이다.
그러니 중구난방이라는 소릴 듣는다.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할터............
물레방아
상가가 있었으나 상림숲 정비사업으로 상가는 철거되고
1998년도 함양을 상징하는 물레방앗간을 건립했다고한다.
함양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의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라는 물레방아가가 있을정도로 함양에서은 상징적인 존재라고 한다.
더욱이 1792년도에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안의 현감으로 재직 하신 기간중 연자, 디딜, 수차, 물레방아등을 이용하는 실학사상을 도입하여 선정을 베푸셨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함양지역은 물레방아 가 생겨나고
이용이 크게 늘어나 물레방아 고을이라 했다고 한다.
위천.............
건너편에 하씨 문중 제실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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