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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170828 하동 쌍계사(쌍계사-불일폭포 왕복)

by 명산 김승곤 2017. 8. 31.


쌍계사


일시 : 2017년 8월 28일
장소 : 하동 쌍계사-불일폭포 왕복
거리 : 4.6km
일행 : 하진수형님 형수 그리고 아내


지난주였던가
22일 비도오는데 부터 시작한 카톡
진수 형님이다.
수제비 한그릇 하자부터 막걸리안주도 없는데 라며 결국 문수산 국수집으로 이동 해가 떠 있을 시간부터 술잔을 기울인다.
아마도 오후 5시쯤 되었을끼다.
그렇게 한장 두잔 이 세잔되고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속에 리조트가 어떻고 저떻고 하다 결국 한번 물으나 해보시죠라는제안에 격룩 전화를하게 되고 또 들려오는 이야긴 26일(토요일)까지는 성수기 요금에 그리고 그 이후부턴 포로모터를 적용중이라는 안내문 이다.
단 8월 말까지...
회원가에 50% DC한 가격.....
그러니 혹하는게 당연하다.
지난 봄 제주에서 사용했던 그런 가격이다.
8월 말까지라는데...
사용해보자라는 이야기가 우세하고 그리고 곧장 예약한다.
26평으로.....1박 35,000원

2017년 8월 27일.....
올휴가가 시작되는셈이다.
뭐가 그리고 바빴는지 뜨거웠던 지난 여름휴가는 커녕 작년에 쉬이 갔던 얼음골마져도 포기하고 지내왔던게 사실...
3일이지만 멋지게 후회없데 지내다 오자며 출발이다.
근무와 약속골프로 인해 다소 늦은 오후5시 출발이고....
2시간 30분 걸리던 운행 시간은 3시간만인 20시 하동 켄싱턴 리조트 도착이다.
체크인을 하고는 늦은 식사를 하러 나간다.
화개 골목식당이다.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그런 식당이라는데 머 그져 그런 맞이다.
참게탕,그리고 제첩국으로 소주 일잔으로 오늘 피로를 날려 버린다.
내일을 위해서....

8월 28일....... 
식사후 켄싱턴 리조트를 나선다.
오늘 목표는 쌍계사 불일폭포, 그리고 구례 사성암, 수락폭포를 투어 할계획이다.
쌍계사 들머리이다.
입장료가 1인당 25,00원이다.

쌍계사 하동간 버스시간표이다.
13차레 다니는 시간 버스다.
그리고 구례까지 다니는 시간버스도 7차례이다.

쌍계총림 Information 이다.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724년(신라 성덕왕 23)에 義湘大師의 제자인 三法스님이 六祖 慧能大師의 頂相(머리)를 봉안하고 蘭若을 세운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는 쌍계사 홈피의 글이다.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한 쌍계사
여러 문화재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 해동다성진감선사추앙비, 차시배지(茶始培地)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하는데.
쌍계사는 도의국사와 동시대에 활약한 진감선사가 육조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의 연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로 일컬어진다고 한다.

일주문(경남 유형문화재 제86호)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며, 항상 한마음을 가지고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되어 있는 다포식이다.

금강문(경남 유형문화재 제127호)
금강문은 일주문 다음에 통과하는 문으로 천왕문과 함께 절에 들어오는 공간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의미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금강역사를 모시고 있는데 금강역사는 불교를 수호하고 악을 벌하는 천신으로 문의 왼쪽에는 부처님을 늘 모시는 ‘밀적금강’이 있고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있다.
쌍계사 금강문은 신라 문성왕 2년에 진감국사가 지었고, 인조 19년(1641)에 벽암선사가 다시 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9에 수리한 것이다.

천왕문(경남 유형문화재 제127호)
쌍계사 천왕문은 숙종 30년(1704)에 박봉스님이 지었고 순조 25년(1825)에 고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고산스님이 1978년에 다시 수리한 것이다.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사천왕은 부처님께 의지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하는 스님과 선량한 사람을 돕는 4명의 수호신이다.
동주를 다스리는 지국천왕, 서주의 광목천왕, 남주의 증장천왕, 북주를 다스리는 다문천왕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은 개방해서 통로로 사용하고 있고, 양 옆칸은 벽으로 막은 후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사천왕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이게 뭐하는 문일꼬 ?

쌍계사 9층석탑
고산 스님이 인도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3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2과와 전단나무 부처님1위를 모셨다
이탑은 보물 제48호인 오대산월정사팔각 9층탑과 유사한 형태의 탑으로 1987년 (불기2531년) 착공하여 1990년 3월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는 개인의 시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백일홍/보라색

백일홍/흰색

대웅전(보물 제500호)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 건물이다.
쌍계사는 840년(신라 문성왕 2)에 진감선사(眞鑒禪師) 혜소(慧昭)가 개창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로, 자연조건에 순응하면서 건물을 배치한 산지(山地) 가람의 대표적 일례이다.
대웅전은 가람의 중심이 되는 전당으로, 큰 힘이 있어서 도력(道力)과 법력(法力)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으로, 이 사찰의 본전이다.

대웅전 목조 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하동 쌍계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삼세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그리고 일광·월광·관음·세지보살로 추정되는 네 보살입상이다.
중앙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은 본존불로서 삼불상 중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육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동그스럼해진 머리는 이마 위쪽과 머리 꼭대기에 중앙계주(계珠)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둥글넓적한 얼굴에는 근엄한 듯 온화한 미소가 엿보인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고 있는 통견(通肩)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도록 함으로써 17세기 전반 경 이후 불상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옷 입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실제 인물의 손처럼 표현되어 사실성이 돋보여 조성 화원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느끼게 한다.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년)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썼으며 환영스님이 새겼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의 하나로 유명하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에 입당,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 쌍계사를 창건하고 역대 왕의 존경을 받다가 문성왕 12년(85) 쌍계사에서 77세로 시적하였는데.
비의 높이는 3m 63cm, 탑신의 높이는 2m 2cm, 혹은 1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현재 비신의 우측 상부에 크게 흠락된 부분이 있고 또 균열이 상당히 심하다.
중앙에 높직한 비좌를 마련했는데 4면에는 운문이 있고 상면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귀두는 짧고 추상적인 동물의 머리로 표현되어 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쟁주하는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비문의 자경은 2.3cm, 자수는 2,423자이다.

쌍계사 석등(경남 유형문화재 제28호)
지리산의 남쪽기슭에 자리한 쌍계사의 경내에 서 있는 8각 석등이다.
원래는 3단으로 이루어진 받침 위에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리고 지붕돌을 덮은 후 머리장식을 얹었을 모습이나,
지금은 화사석과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아래받침돌에는 복련(覆蓮:엎어놓은 연꽃무늬)을 둘렀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앙련(仰蓮:솟은 연꽃무늬)을 조각하였다.

쌍계사 5층석탑
단층기단위의 오층석탑이 올려져 있는 모습....
아스라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 세월의 단아함이 느껴 진다.

쌍계사 마애불(경남 문화재자료 제48호)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 큰 암석의 한 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고 크게 표현되었으며, 옷은 두툼하여 옷주름이 무릎 부분 이외에는 뚜렷하지 않다.
왼손은 오른손 위에 올려 놓고 있어 무엇인가를 받들고 있는 듯하다.
스님으로 보일 만큼 매우 순박한 모습의 이 불상은 옷이나 손모양 등에서 특이한 점이 보이며,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약사여래불로 보이며,높이 135센티 폭90센티이다.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이다.
석종형 부도로 2007년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부처님 진실사리를 모시고 조성하였다고 한다.
뒷편에는 금강계단마애삼존불이 있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란 금강보계에서 유래된 말이므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란 의미가 있다.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금강계단에는 부처가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이라 하고, 금강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혜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으로 성취될 수 있으며, 삼학 가운데 계율이 으뜸이고, 계를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하는 데는 불사리를 봉안한 곳이 으뜸이라는 뜻에서 금강계단이라고 하였다.
이들 금강계단의 전면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을 건 전각을 건립하는데, 그곳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금강계단에 불(佛)을 상징하는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

화엄전(쌍계사 소장 불경책판;경남 유형문화재 제185호)

소장되어 있는 불경책판의 규모는 모두 33종 1,743매이다.
이 책판들의 제작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이 1603년(선조 36) 전후로 쌍계사의 말사인 능인암(能仁庵)에서 개간하여 쌍계사로 옮겨온 것들이다.
이밖에도 쌍계사에서 직접 간행한 것과 승려 문집으로 간행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대웅전 뒷편에 놓여 있는 구시......

엣날에 스님들이 밭 들어 먹었다고 한다. 

금당.............

입구 오른쪽으로 불일폭포 가는길이다. 

금당은 원래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의미하는데,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을 봉안하고 금당이라 이름한 것은 조사의 가르침을 중시한 선총 사찰의 특징이다.
금당영역은 수행자의 공간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며 하안거, 동안거 해제 후 3개월은 산문을 열어 개방한다고 한다.

돌 사이에 삐죽 나온 대나무(설대)

국사암 갈림길이다.
724년(성덕왕 23)에 雲巖寺의 삼법화상이 터의 지기가 뛰어나므로 육조의 정상을 묻고 당우를 지은 것이 암자의 시초라고 한다.
국사암이라는 寺名도 진감국사와 관련이 깊은데, 신라 민애왕이 중창주인 진감선사를 스승으로 봉하여 진감국사라 칭함으로 인해 국사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암자에는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살아서 나무가 되었다는 천년 넘은 느릅나무가 있다고 하는데 둘러 보지는 못했다.
다음에 함 가봐야겠다.
목압마을에서 올라가면 금방 갈수 있는 길이 있으니 말이다.

불일폭포 가는길에 ...........빈의자

환학대
불일암 주변에 머물던 최치원이 청학동에 산다는 청학을 불러들인곳이라 한다.

마족대
청학동에 살던 최치원이 말을 타고 가다 멀물렀던곳이라 한다.
또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지리산에 오를적 생간 말발굽자국이 바위에 새겨진것이라 한다.
그리고 말이 지나간 자국이라는 뜻으로 마적대 마족암이라고도 한다.

바위에 새겨진 말발자국이라고 한다.

불일 평전의 모습이다.

불일평전 지킴이

불일평전의 모습

불일평전 대피소........

불일평전의 모습

불일평전 탐방 지원센터

소망탑

불일평전 식수와 폐가

불일평전 탐방지원센터

삼신봉 가는길과 불일폭포 가는길.............

불일폭포 가는길...........

불일폭포 가는길...........

불일폭포 가는길...........

불일폭포 ...........

불일폭포 ...........

불일폭포 이다.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입적하자 고려 21대 왕 희종(熙宗)이 지눌이 머물던 암자에 불일(佛日)이라는 시호를 내려 암자 이름을 불일암(佛日庵)이라 하였는데, 그 가까이 있는 폭포이므로 불일폭포라 하였다고 한다.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불일폭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처럼 중간의 학연에서 돌려 다시 쏟아져 내린다.
높이 60m, 폭 3m의 지리산 유일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거폭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 폭포이다.
그런데 쏟아지는 폭포수에 의해 시원함이 이룰수 없다.
게다가 안내판에는 음이온이 많이 나온다 하여 두여인네는 갈생각을 않고 있다.

불일폭포와 두여인

불일폭포



불일암 佛日庵

쌍계사 뒤 산기슭 10리 남짓한 곳에 있는데  진감선사가 창건하였으나 佛日普照國師의 도량이므로 불일암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중간에 페허가 된 것을 1911년 신해년에 본사의 승려 梁龍隱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깍아지른 골짜기가 끊어진 듯이 높고 시내를 가로질러가는 길이 없는 좁고 굽은 절벽이라 가히 한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길
이따금 떨어지는 낙석을 커버 하기 위해 인공적인 구조물이 눈에 거슬리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듯 해보인다.

불일암 대웅전

쌍계사 날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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