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폭포
1.산행구간 : 쌍계사-불일폭포 왕복
2.산행일자 : 2021. 4.26 (월요일)
3.산행거리 : 7.7km
◎ 켄싱턴 리조트 (06:00)
◎ 쌍계사 대웅전(06:20)
◎ 국사암 갈림길(06:30)
◎ 마족대(07:00)
◎ 불일평전(07:15)
◎ 불일폭포(07:30)
◎ 불일암(07:40~08:10)
◎ 쌍계사(09:00)
어제 저녁 불일폭포 가자 되었다.
야생차 축제장에서
그리고 리조트에서 드론쇼까지
행사와 더불어 덕음차일정까지 참 잘 맞춰준 일정이다.
06시 리조트를 나선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화개골을 타고 내려온다.
무엇하나 오염된 원인이 없으니 바람까지 차갑다.
쌍계사 입구다.
입장료가 1인당 2500원 이지만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쌍계총림 Information 이다.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724년(신라 성덕왕 23)에 義湘大師의 제자인 三法스님이 六祖 慧能大師의 頂相(머리)를 봉안하고 蘭若을 세운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는 쌍계사 홈피의 글이다.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기도 한 쌍계사
여러 문화재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 해동다성진감선사추앙비, 차시배지(茶始培地)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하는데.
쌍계사는 도의국사와 동시대에 활약한 진감선사가 육조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의 연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로 일컬어진다고 한다.
일주문(경남 유형문화재 제86호)
절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며, 항상 한마음을 가지고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되어 있는 다포식이다.
금강문(경남 유형문화재 제127호)
금강문은 일주문 다음에 통과하는 문으로 천왕문과 함께 절에 들어오는 공간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의미있는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금강역사를 모시고 있는데 금강역사는 불교를 수호하고 악을 벌하는 천신으로 문의 왼쪽에는 부처님을 늘 모시는 ‘밀적금강’이 있고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있다.
쌍계사 금강문은 신라 문성왕 2년에 진감국사가 지었고, 인조 19년(1641)에 벽암선사가 다시 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9에 수리한 것이다.
천왕문(경남 유형문화재 제127호)
쌍계사 천왕문은 숙종 30년(1704)에 박봉스님이 지었고 순조 25년(1825)에 고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고산스님이 1978년에 다시 수리한 것이다.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사천왕은 부처님께 의지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하는 스님과 선량한 사람을 돕는 4명의 수호신이다.
동주를 다스리는 지국천왕, 서주의 광목천왕, 남주의 증장천왕, 북주를 다스리는 다문천왕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은 개방해서 통로로 사용하고 있고, 양 옆칸은 벽으로 막은 후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사천왕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쌍계사 9층석탑
고산 스님이 인도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여래 진신사리3과와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2과와 전단나무 부처님1위를 모셨다
이탑은 보물 제48호인 오대산월정사팔각 9층탑과 유사한 형태의 탑으로 1987년 (불기2531년) 착공하여 1990년 3월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는 개인의 시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雙磎寺 대웅전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로. 보물 제500호이다.
평면구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제47호)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년)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썼으며 환영스님이 새겼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의 하나로 유명하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에 입당, 흥덕왕 5년(830년)에 귀국, 쌍계사를 창건하고 역대 왕의 존경을 받다가 문성왕 12년(85) 쌍계사에서 77세로 시적하였는데.
비의 높이는 3m 63cm, 탑신의 높이는 2m 2cm, 혹은 1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현재 비신의 우측 상부에 크게 흠락된 부분이 있고 또 균열이 상당히 심하다.
중앙에 높직한 비좌를 마련했는데 4면에는 운문이 있고 상면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귀두는 짧고 추상적인 동물의 머리로 표현되어 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쟁주하는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비문의 자경은 2.3cm, 자수는 2,423자이다.
쌍계사 5층석탑
단층기단위의 오층석탑이 올려져 있는 모습....
아스라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 세월의 단아함이 느껴 진다.
쌍계사 마애불(경남 문화재자료 제48호)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 큰 암석의 한 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고 크게 표현되었으며, 옷은 두툼하여 옷주름이 무릎 부분 이외에는 뚜렷하지 않다.
왼손은 오른손 위에 올려 놓고 있어 무엇인가를 받들고 있는 듯하다.
스님으로 보일 만큼 매우 순박한 모습의 이 불상은 옷이나 손모양 등에서 특이한 점이 보이며,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약사여래불로 보이며,높이 135센티 폭90센티이다.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河東 雙磎寺 金剛戒壇)이다.
석종형 부도(石鍾型 浮屠)로 2007년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부처님 진실사리를 모시고 조성하였다고 한다.
뒷편에는 금강계단마애삼존불(金剛戒壇磨崖三尊佛)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의 금강(金剛)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이므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戒)란 의미가 있다.
불사리(佛舍利)를 모시고 수계의식(授戒儀式)을 집행하는 금강계단에는 부처가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이라 하고, 금강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혜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으로 성취될 수 있으며, 삼학 가운데 계율이 으뜸이고, 계를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하는 데는 불사리를 봉안한 곳이 으뜸이라는 뜻에서 금강계단이라고 하였다.
이들 금강계단의 전면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을 건 전각을 건립하는데, 그곳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금강계단에 불(佛)을 상징하는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화엄전
쌍계사 목판 대장경
옥천교
금당및 팔상전, 블일암, 불일폭포 가는길
국사암 갈림길이다.
724년(성덕왕 23)에 雲巖寺의 삼법화상이 터의 지기가 뛰어나므로 육조의 정상을 묻고 당우를 지은 것이 암자의 시초라고 한다.
국사암이라는 寺名도 진감국사와 관련이 깊은데, 신라 민애왕이 중창주인 진감선사를 스승으로 봉하여 진감국사라 칭함으로 인해 국사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암자에는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살아서 나무가 되었다는 천년 넘은 느릅나무가 있다고 하는데 둘러 보지는 못했다
환학대
통일신라시대 학지인 최치원 선생이 속세를 떠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 다니던중 이곳에서 학을 불러 타고 더녔다는 전설이 있던곳이라고 한다.
더구더나 진감선사를 기리는 진감선사공탑비의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마족대
말이 지나간 발자국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 학지인 최치원 선생이 말을 타고 가다 머물렀던 흔적이라고...
또 한가지 설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말을타고 지리산을 오를때 생긴 말발자국이라는 설도
불일평전이다.
불일탐방지원센터가 있지만 인기척이 끊어진지 오래인듯 보이고..
그 뒷쪽은 봉명산방이 있던곳인데 지금은 그흔적없이 새로운 건물을 세우려는듯 중장비를 동원 기초를 다지고 있다.
파전등 막걸리등 구수한 냄새가 나던것이 엊그제 같건만...
한때 야영과 취사가 가능했던그런곳이라 지리산에서 세석평전,돼지평전등과 같이 불일평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불일평전은 고 변규하 선생이 불일평전을 가꾸며 30여년동안 지내가 2007년 작고후 몇몇이 자리를 잡아보려 드나들기를 몇번후 견지지 못하고 결국 산장은 빈집으로 있다 폐가수준에 이르러 지금은 철거되어 있다.
불일폭포
쌍계사에서 금당 팔상전 방면으로 약 2.5km구간의 산책길.....
신라 말기 진감국사가 창건한 불일암이라고 하는 작은 암자와 함께 높이 60m의 2단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서 떨어지는 불일폭포.....
그안내판을 보면 용소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살짝 쳐서 청학봉과 백학봉을 만들고 그사이로 물이 흘러 폭포가 되었다고 ....
그리고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입적하자 고려 21대희종이 지눌에게 내린 시호를 붙혀 불일폭포라 했다고 한다.
그나저나 이폭포물은 쌍계사 계곡을 지나 화개천으로 흘러든다는 설명이다.
불일암
불일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입적하자 고려 21대희종이 지눌에게 내린 시호이다.
쌍계사 뒤 산기슭 10리 남짓한 곳에 있는데 진감선사가 창건하였으나 佛日普照國師의 도량이므로 불일암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중간에 페허가 된 것을 1911년 신해년에 본사의 승려 梁龍隱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혜능 스님은 당 태종 정관 12년 중국 최남부 지방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노씨이며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소년 시절부터 나무 장사를 하여 늙은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했다.
그는 어느 날 시장에 나무를 팔러 갔다가 탁발승이 독경하는 소리를 들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던 중 용무소주 이생기심(응당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라는 구절에 마음이 끌리고 홀연히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가 독경한 스님에게 “무슨 경입니까?” 라고 물으니 스님이 “금강경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금강경 배우기를 간청하며 자기가 조금 전 듣고 느낀 심경을 이야기하니 탁발승은 황매산 오조 홍인 대사를 찾아가라고 소개해주었다.
탁발승은 젊은이의 발심을 기특하게 여겨 금 열 냥을 건네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옷과 음식을 사 어머니를 편히 모신 뒤 홍인대사를 찾아가 뵈옵고 예배했다.
홍인대사가 물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그가 대답했다.
“영남 신주에서 오직 깨달음의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영남인은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사람은 남쪽 북쪽이 있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홍인대사는 몇 마디 나눈 말로 젊은이가 비범한 큰 그릇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학인들의 눈치를 염려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며 방앗간에서 일이나 하라고 몰아내었다.
그날부터는 노씨 성을 가진 행자라는 의미의 노행자로 불리며 방아를 찧어 스님들을 공양했다.
노 행자가 방아를 찧기 시작한 지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가 방앗간을 둘러보게 되었다.
대사는 힘이 부족하여 돌을 등에 지고 열심히 방아를 찧는 노 행자에게 말했다.
“혹 나쁜 사람이 너를 해칠까 염려하여 더 말하지 않은 것인데, 네가 그 뜻을 알았느냐?”
그 질문에 노 행자가 대답했다.
“예, 저도 스님의 뜻을 짐작했습니다.”
하루는 홍인대사가 문하대중을 모아 놓고 일대의 놀라운 포고를 했다.
“대중은 들으라. 세인들은 생사가 큰일인데 너희들은 복이나 구하고 있지 태어나고 죽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진리는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은 스스로의 지혜를 돌아보고 본심의 지혜로운 마음을 게송으로 표현하여 나에게 가져 오라.
만일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대에게 초조 달마대사 이래의 가사와 발우 그리고 법을 전하여 육대조사로 삼겠노라.”
그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오조의 법을 이어받아 육조가 될 자라고 지목을 받고 이가 있었는데, 바로 신수 대사이다.
신수 대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대중들이 다니는 복도 벽 위에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였다.
몸은 보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이것을 본 홍인대사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게송임을 알았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이 게송을 따라 수행하라고 했다.
노 행자는 여전히 방아만 찧다가 어느 사미승이 외우는 어느 사미승의 게송을 들었다.
노 행자는 역시 그것이 아직 깨달음의 진의를 증득하지 못한 게송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날 밤 글을 잘 모르는 노 행자는 동자승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부르는 게송을 신수의 게송 옆에 써 달라고 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역시 바탕이 아니로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먼지가 묻으리오
노 행자의 게송을 본 대중은 놀랐다.
그리고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육신 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수근거렸다.
홍인대사도 노 행자의 게송을 보았다.
그러나 신발로 문질러 지우며 “이 게송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조실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홍인대사는 방앗간에 가셔서 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를 찧는 노 행자에게 물었다.
“쌀을 얼마나 찧었느냐?”
이에 노 행자가 대답했다.
“쌀은 찧은 지 오래되었사오나 키질을 아직 못하였나이다.”
이 말을 듣고 홍인대사는 주장자로 방아를 3번 내려치고 거처로 돌아갔다.
노 행자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삼경에 찾아가니 홍인대사가 부촉했다.
“네가 이제 제 6대조가 되었다.
잘 두호하고 지키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
노 행자는 무명의 나무장사로 출가한 지 8개월 만에 동토 초조 달마대사의 정법상승인(후계자)의 의발(가사와 발우)과 법을 오조 홍인대사에게 전수받아 육조 혜능대사가 되었다.
혜능은 절에서 빠져나와 조계산으로 간 뒤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켜 법통을 이어갔다.
신라성덕왕 때 의상조사의 제자인 삼법 스님은 대비 스님과 함께 중국에 불법을 최초로 전수한 달마대사의 법통을 이은 육조 혜능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혜능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말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
그러다 혜능선사의 <육조단경><유통부척>편에 “내가 멸한 뒤 5-6년 후 내 머리를 가지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 부분을 읽고 등신불이 된 혜능선사의 머리를 모셔오겠다고 결심했다.
삼법 스님은 김유신 장군의 부인에게 2만 금을 빌려 중국에서 혜능선사의 머리를 훔쳤고 경주 영묘사에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꿈에 나타난 혜능선사의 계시에 따라 강주(진주)의 지리산에 한겨울에도 칡꽃이 피는 곳 화개를 찾아 머리를 깊이 봉안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세웠다.
암자가 소실 된 후에는 진감 선사가 이 터에 다시 암자를 창건하고 육조 혜능의 정상을 봉안한 그 위에 육조진전을 건립했다
내려간다는 말에 쑤스러운듯 배웅을 한다
육조 혜능대사의 두상이 있다는 금당....
하안거 동안거 외에는 참배가 가능하다고...
육조 혜능대사의 두상이 안치되어 있는 석탑
3/2지점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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