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분산 (179,9m)
1.산행구간 : 용산마을 창나루주차장-마분산-영아지주차장-개비리길
2.산행일자 : 2022. 04.11(월요일)
3.산행거리 : 6.77km
4.산행동무 : 아내
◎ 용산마을 창나루 주차장 (08:00)
◎ 창나루 전망대(08:10)
◎ 마분산/179m(08:30)
◎ 영아지쉼터(08:50)
◎ 영아지주차장(09:00)
◎ 죽림쉼터(09:30)
◎ 용산마을 창나루 주차장(10:00)
몇일전에 아내가 촌(친정)에 함 가자 되었다.
장모님이 울산 병원 다녀간 이후 지난주 코로나 확진으로 심하게 앓았다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또 봄에 무한대로 자라는 봄나물을 가져 가라는 성화에서다.
하지만 촌에만 다녀온다는게 아무래도 모잘랄것 같은 생각은 아내나 내나 같은 생각에서인지 조금 일찍 출발해서 어디라도 둘렀다 가자는게 공통된 일치다.
하여 갈모봉을 둘렀다 가지 오는길에는 창령 남지 개비리길을 다녀오자 뭐 그리 되었다.
그런데 날씨가 변수다.
봄철 날씨는 예상을 할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날씨라지만 기상청에서 이를 반영치 못하니 갑갑할수밖에...
비온됐다고 한두시간만에 바꿔놓고...
맑음 날씨에서 어느새 구름많이 바꿔놓고...
GR같은 ...
4월 11일 06시 집을 니선다.
가는길에 창령남지 개비리길, 그리고 유채밭을 둘렀다 가기로 한다.
하여 네비를 남지 체육공원을 맞추고 출발한다.
밀양, 창령 영산 그리고 남지까지는 1시간 40분 남짓이다.
노랗게 피워 오른 유채밭 그러니까 남지체육공원을 지나 둑길따라 용산마을 창나루 주차장들어가기전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는 준비한 주먹밥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08시 ....
베냥에 물, 그리고 과자 한봉지 넣고 넣고 출발한다.
들머리는 포장도로가 끝나는 부분으로 해설사의 집도 보이고 개비리길의 안내문...
그리고 마분산 들머리는 남지 개비리길이라는 안내판과 오른쪽으로 먼지 털이 , 그리고 나무계단길이 이어지는데....
마분산까지는 1.69km라고 적혀 있다.
마분산과 창나리마을 유래도 적어 놓았다,
창이 있던 나루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창진이라 적는다고 한다.
이마을 뒷산을 창진산, 마분산이라 불린다고 한다.
창나리마을 유래는 신라때 산앞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건너 백제와 국경을 이룸으로 이곳마을에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로인하여 창고가 있던 나루라 하여 장니리마을로 지금까지 불리어지고 있다고 한다.
또 산이름도 창진산으로 불리어지다 임진왜란때 홍의장군 곽재우의병장의 죽은말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하여 말무덤산(마분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고 한다.
천강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은 마분산에 토성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오르는 왜적을 맞아 신출귀몰 백전 백승 하였다니
이토성은 강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하여 힘들게 올라온 적과의 육탄전에서 승리할수 있게 만들었다 한다.
이에 적 왜장 하시바가 강변에서 공격을 준비하는것을 보고 모든것이 열세인 전면전투로는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여 자신의 말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돌격하여 벌때의 공격으로 혼란을 틈타 대승을 거두는데 적유탄에 자시느이 말이 사살되자 그공으로 토성안에 말의 부덤을 만들어 주는데 둘레가 25m 높이가 5m렸다고 한다.
6남매나무
다섯주간의 소나무 중앙에 산벚꽃씨가 떨어져 싹을내어 소나무 5개 주간 사이를 통하여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소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다는 설명이다.
삼형제 소나무라고.......
마분산 갈림길
의병무덤
말무덤산 정상인 이곳에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을 맞아 곽재우의병장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들이 합장되어 있는 거대한 무덤이다.
둘레가 20m높이 5m내부에는 석실이 있는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단부는 돌을 쌓아 둘렀다 라고 되어 있다.
420년이 지나는 동안 도굴꾼에게 도굴되고 지금은 개인 무덤만이 조성되어 크게 훼손되어 지금의 상태로 남아있다고.....
목동들의 이름이 새긴돌
나무삼어 사태막자 등 이름이 새겨진 돌들이 박혀 있다.
아마도 민둥산이었던 마분산등지에 소를 방목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글자를 새겼다는 이야기인데 별 의미 있는 내용은 아닌듯 해보이지만 창령군에서 안내판까지 세워 두었다.
우리도 어릴적 돌에 이름같은거 많이 샤겨 두었는데...
그것도 기념이 될랑가...
전설의 마분송이라고.....
마분산 주변에 주간이 여러개로 분주하여 자라는 소나무가 있는데 마분산에 자라는 다간 소나무를 마분송이라 한다고 ....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장이 나무에 옷을 입혀 허수아비로 만들어 의병의 숫자가 많은것처름 위장하여 적을 물리쳤다는 내용인데....
이들 다간 소나무들은 의병을 수호하고 주간을 여러개로 분주하여 우거진슾으로 만들었다고..
직진 -> x167.5m
임도 -> 영아지 쉼터
x167.5m
우슬봉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영아지킴터로 내려서야 한다.
영아 쉼터이다.
임도도 있고.....
조금전 올라올때 차소리가 나더만은 소나무 주변 잡나무를 베어내는 작업자들의 차량이다
작업하는 사람들
영아지 전망대이다
하지만 조망은 제로다.
그리고 그옆에 낙동강 최후 방어선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곳이다.
1950년6월 전쟁발발후 5개월만에 낙동강이북이 점령 당하는등 수세에 몰리던 아군은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구축
창령과 남지지역을 담당하는 미2사단이 낙동강 박진나루를 중심으로 적과 대치
8월 15일까지 부산점령이라는 임무수행을 맡은 북한 4사단은 합천에 집결 8월 6일 박진나루를 도강하여 기습침투 미군과 치열한 전투속에 영산면까지 침투 하였다
하지만 미군과의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끝내 진지를 사수 하지만 낙동강 전투는 남지철교의 파괴와 함께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고 한다.
그리고 아군의 반격과 함께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하는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지에는 박진전쟁 기념관, 그리고 박진지구 전작비가 세워져 있다
영아지 주차장이다.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의 안내판과 함께 근사한(?) 화장실 그리고 쉼터도 조성 되어 있다.
호수같은 낙동강.....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쉬는 김에 물도 마시곻 커피도 한잔 하고..
또 볼일도 보고...
할거 다하고 일어선다.
낙동강
쉼터
남지 개비리길이다.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 창아지 나루터까지 낙동강 벼량을 따라 지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개비리길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의병장이 육지에서 첫승리를 거둔 기음강 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곳이다.
유래는
영아지 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누렁개가 11마리 새끼를 낳았는데 그중 한마리가 유독눈에 띄는게 조그많고 못나고 볼폼이 없어 보였다.
본시 개의 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먹이사슬에 밀렸고 이를 본 할아버지는 가엾게 되어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팔고 1마리만 남겨 두었는데..
어느날 산너머 시집간 황씨딸이 친정에 왔는데 딸이 돌아가면서 못생긴개를 키우겠다고 시댁인 알개실로 데려갔는데
며칠후 친정의 누렁개가 시댁에 데려간 못 생긴개에게 젖을 먹이고 돌아가는게 아닌가
그러니까 젖을 주려고 매일같이 산을 넘어 온다는것이다.
폭설이 내린날에도 여전이 알개실 마을에 나타나는데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뒤를 밟아 봤는데
그길은 낙동강 절벽 눈이 쌓이지 않는 길따라 다녔다고 했다
이때부터 개(누렁이)가 다닌길 즉 비리(절벽)로 디니게 되어 개비리 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개는 강가, 비리는 벼랑이라는 뜻의 비루에서 나온말로
강가절벽위에 난길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야생화 군락지라고
죽림쉼터이다.
왕죽으로 빼곡히 자라고 있다
나무사이에 돌을 끼어 넣어놓은 나무이다.
안내판에는
여양진씨 감나무 시집보내기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고유의명절 세시풍속중 하나로 단오날 양기가 왕성한 시기에 흉년을 대비하여 이뤄 졌던곳으로 조상들의 흉년을 극복한 하나의 방법이다.
단오날 대추나무와 감나무(층매화) 는 암꽃만 피기때문에 나무가지사이에 돌을 끼어 넣어 주는것으로 감나무 시집보내기를 하면 간마무가 위기의식을 느껴 생존본능에 의해 열매를 많이 달수밖에 없다는 조상님들의 지혜라 볼수 있다.
이곳 여양진씨 집 앞뜰에 심어진 나무는 70년 이란 세월속에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옥관자 바위이다.
남지읍 동포마을 박모씨가 수로공사중 발견 했다고 한다.
봉황새의 알처름 타원형 모양이었으며 크기가 오척이 넘었다고 한다.
영험한 기운과 주변 옹달샘에는 서광이 비치면서 맑은 샘물이솟아나고 주변 산세가 마치 용이 승천 하는것처름 자욱한 운무를 반들어 냈다고...
관직에 등관 시킨 층층나무라는 안내문이다.
의령 지정면 두곡마을에 재령이씨 집안이 1929년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때 늘 낙동강 수로를 이용, 배를 띄워 사람들의 이동이 편리한 수변(지금의 옹달샘주변)에 삷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주로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르 ㄹ잡아 시장에 팔아 춘궁기를 면했지만 강물 범람으로 재해가 발생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함들었다고...한다.
그때마다 재령이씨 할머니는 옥관자앞에서 매일같이 기도를 했고..
그로부터 100일째 되던날
날이 샐무렵 백발에 긴수염을 한 산신령님께서 강무를 타고 꿈에 나타나 나무 한그루를 점지해주시고 사라졌다.
이에 꿈을 깨어 그곳으로 가보니 나무껍질에서 광택이 나는 나무한그루를 만나는데 그날부터 나무앞에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되지 않아 슬아에 둔 아들이 괸직에 입문하게 되고 고을원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층층나무는 영험하기로 유명해지면서 남지읍 곳곳 심겨졌다고 한다.
집에 층층나무를 심어놓으면 관직과 직장에 있는 사람은 막힘이 없이 승승장구 했다는 이야기이다.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다.
홍의장군 북은 돌신발이라고....ㅎ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는 의령 유곡면 외가에서 탄생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22일만에 기음강(남강과 낙동강 합류지점)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는데....
의령 창령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데 왜군은 붉은 색만 보이면 두려워 도망갔다고 한다.
어느날 망우당 곽재우가 외가에 출타했다 왜구가 기음강변에 출몰했다는 소식에 기음강을 도강하다 붉은색 신발 한쪽을 물에 떠나 보내 버렸는데 그신발이 남지읍 창나루강변에 놓이게 되었다고...
이에 망우당 선생은 이 붉은 신발만 보관만 잘해도 왜구들이 침범하지못할것이다며 창나루 주민들은 붉은 산발을 잘 보존해왔지만 일제 감점기에 왜놈에게 빼앗겼다고....
그리고 그 신발은 낙동강에 던져졌다고 한다.
어느날 마을 이장에게 망우당 선생이 현몽하시길 말씀 하신곳으로 가보니 붉은 색 신발모양의 돌이 기음강 주변 땅속에서 발견
주민들은 고유제를 지내며 이자리에 모시게 되었다고.....
약 두시간만에 마분산, 그리고 남지 개비리를 돌아 왔다.
6km가 넘는 거리이지만 바쁜 걸음을 했다.
일찌기 촌으로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용한건지...
앞에 세워놓으니 얼마나 달리는지....
남지 체육공원 주변에 조성되어 있는 유채밭과 튤립...
코로나로 인해 3년째 축제를 취소하고 있다고...
애써 키운 꽃들은 뭇사람들에 보여줘야 한다는 남지읍의 꽃사랑..
오늘도 많이 심고 있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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