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昌德宮)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창덕궁 (昌德宮)
15시 문화해설사의 후원 예약으로 후원관람후 창덕궁 (昌德宮)을 돌아보게 되었다.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대조전 등 중요 궁궐전각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 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 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고 한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창덕궁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다는데 .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이다.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이다.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는데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는 설명이다.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으며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들어가서 돌아본 돈화문이다.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진선문(進善門)
궁궐의 중문으로 일본 강점기때 혈렸다가 1999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문에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돈화문에 경비가 있고 한데 이곳까지 와서 신문고 북을 이용했을 백성이 있었겠는가 싶다.
어로
창덕궁 숙장문(昌德宮 肅章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中門)이 숙장문이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빙 둘러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인정문(仁政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라는 설명이다.
인정전(仁政殿)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 한다.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라한다.
하지만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선정전 (宣政殿)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이라 한다.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고 한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는 설명이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창덕궁 대조전(昌德宮大造殿)
왕비가 생활하던 중궁전의 건물이다.
조선 태종5년(1405)에 처음 지었으나 그 후 여러차례 불에 탔다.
현재 이 건물은 1917년 불타서,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 침실은 왕과 왕비의 잠자리를 지키는 상궁의 작은 방들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희정당(熙政堂)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이라 한다.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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