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은 태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이 휴식하던 곳이다.
후원은 북원(北苑), 금원(禁苑)이라고도 불렀으며, 고종 이후 비원(秘苑)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라며 비원(秘苑)을 후원으로 사용해 될라는 해설사의 주문이다.
낮은 야산과 골짜기에 원래 자연 그대로 모습을 간직한 채 꼭 필요한 곳에만 사람의 손을 댄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정원이다.
부용정과 부용지, 주합루와 어수문, 영화당, 불로문, 애련정, 연경당 등을 비롯한 수많은 정자와 샘들이 곳곳에 있다고 한다.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
창덕궁 돈화문(昌德宮 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그리고 보물 제383호.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고, 1451년(문종 1)과 1506년(연산군 12)에 개조하여 더 크게 만들라는 왕명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처음에는 지금보다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는 별궁이었던 창덕궁이 점차 정궁의 구실을 하게 되면서 정문을 보다 위엄있게 만들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1) 다시 지었고, 1721년(경종 1) 동쪽 아래·위층 부연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입장권
진선문(進善門)
금천교를 지나면 나오는 중문이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것으로 추정 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 공사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 공사를 완료하였다고 한다.
진선문의 신문고 설은
태종은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겠다며 진선문에 신문고를 설치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간에 흐지부지 되었던것을 1771년 영조가 다시 설치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 (경국대전)라고 신문고를 치는 절차도 명문화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 절차가 다소 복잡한데다, 포졸들이 서 있는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까지 가서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어로(御路)가 나 있다.
숙장문 [肅章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中門)이 숙장문이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빙둘러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左贊成) 서거정(徐居正)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후원 가는길
후원 입구와 창경궁 후문
후원 입구
이곳에서 문화 해설사와 함께 입장한다.
문화 해설사의 인사와 설명
미세먼지가 기득한 이런날에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그런 내용들이다.
창덕궁 부용지(昌德宮芙蓉池)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방형의 연못이다.
부용지의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라고한다.
창덕궁 부용정(昌德宮芙蓉亭)
보물 제1763호라고 한다.
창덕궁 부용정은 주합루 남쪽 부용지(芙蓉池)에 면한 누각이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한다.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부용정은 원래 숙종 33년(1707) 택수재(澤水齋)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부용정(芙蓉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용정에서는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축하해 주었다고 하며. 또 정조 19년(1795)에는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이 정자에서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에 창립된 2층 누각 건물이다.
아래층은 왕실 직속기관으로 규장각을 그리고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고 한다.
규장각은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위한 도서 수집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주합루로 오르는길에 어수문이 있다.
어수문(魚水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을 가진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를 보여준다는 문이다.
주합루로 올라가는 문은 세곳이지만 왕만이 중간으로 출입이 가능하고 신하들은 어수문 양 협문으로 드나 들었다고 한다.
거의 90도 숙여야 출입이 가는한 문이다.
영화당 [映花堂]
부용지 주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건물이다.
왕과 왕비의 휴식공간으로 왕이 입회하에 별시인 특별 과거시험인 춘장대시를 치루던 곳이라 한다.
특히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룓도 이곳에서 장원 급제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당 동쪽 춘당대는 넓은 마당은 무과 시함을 시행했던곳이라 한다.
불로문(不老門)
하나의 돌을 깎아 만든 특이한 문이다.
월래 이런 형태의 문을 석월문(石月門)이라고 하는데
문 위쪽 면에 전서체(篆書體)로 불로문이라고 새겨져 있어서인지
불로문이라 부르는 것 같다.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인 돌을 사용한 것을 보아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해 세운 것임이 분명하다.
애련정(愛蓮亭),애련지(愛蓮池)
애련지와 애련정은 1692년(숙종 18)년에 지어졌는데, 연꽃을 특별히 사랑했던 숙종이 정자에 애련을 붙여 <애련정>,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고 한다.
숙종이 애련정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숙종이 애련정을 지으면서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周敦頤)가 쓴 애련설(愛蓮說)에서 빌린 것이는데 내 평생 연꽃을 사랑함은 연꽃이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는 설이다.
혹자는 애련이란 군자의 덕으로 상징되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라는데 애련지에는 숙종 임금과 숙빈 최씨(무술이)의 사랑 이야기도 전해지는곳이라고 한다.
기오헌(의두합)
의두합은 효명세자(순조의 아들)가 독서를 하던 서재라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대청 2칸에 우측에는 온돌방이, 좌측에는 내루(안마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단청도 하지 않은 질박한 모습으로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기 위한 만든 건물로 기오헌 뒤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을 오르면 규장각으로 바로 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운경거는 부속 건물로 궐 안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라고 한다.
운경거
뽕나무
12m 그리고 수령 약 400년 된 뽕나무라 하는데 백성들에게 뽕나무 가꾸기를 장려하고 직접 왕비가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등 친잠례를 거행하였다는, 그리고 창덕궁내애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4곳중 하나란다
존덕정
현판을 보면 萬川明月主人翼自序 라는 제목으로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말기 1798년에 직접 지은글이라한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달은 유일하니 그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달을 따르는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아마도 이는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듯하다는 내용이다.
6각인 존덕정(인조1644)은 지붕이 두겹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엉성하지만 하트모양의 못과 옆에는 250년된 은행나무가 있다.
연경당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 연경당을 건립했는데 월래모습은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진작례(進爵禮)는 신하들과 왕과 왕비에게 슬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강화책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현재의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랩했다고 한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따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서재인 선향재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장희빈의 시샘으로 인현 왕후가 궁 밖으로 쫒겨나던 문이며 그리고 돌아 올때도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문이다.
향나무
나이가 무려 750년 된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높이 5~6m정도로 제사때 향을 피우는데 시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2010년 콘파스 태풍으로 부러지는 바람에 더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회화나무
2006년 4월 6일에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수령은 300∼400년으로 추정되는데 나무의 높이는 15∼16m라는 설명이다.
창덕궁 회화나무는 궁궐 앞에 심겨진 회화나무 중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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