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雲峴宮)
운현궁(雲峴宮) 가는길-------------------------------
휘경동 집을 나선다.
새벽부터 휴대폰에서는 미세먼지경보가 내려진 상황이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특보가 내려진 상태라 건너편 아파트가 번호가 희미하게 다가온다.
마스크를 해보지만 가슴하나 깝깝하다.
5일째라하는데 정부에서 서울시에서 여러자치단체별여러가지 대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별 뽀족한 수가 없다.
아들과 점심 약속을 하면서 근무하는 곳을 가보고 싶다는 아내
하지만 아들은 아직 수습사원이라 개인적인 행동을 할수 없는 입장이란다.
그런데도 아내는 아들이 근무하는 곳이 어딘지 보자고 기어이 나서자는데 참 고민 거린다.
그렇게 해서 집을 나선다.
둘째 아들과 점심약속을 하면서까지..
회기역 주변에서 공부하는 둘째와 점심식사후 목적을 위해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각에 내려서는데 건물도 회색이고 도심 전체가 회색빛이다.
숨한번 쉬기가 이렇게도 힘들단 말인가 싶다.
종각 1번 출구로 나와 세종대로 사거리까지 나오는데 고종즉위40년칭경 기념비를 돌아서 교보문고 앞으로 올라가는데..
오늘만큼이라도 광화문 광장은 조용해보인다.
물론 세월호 희생자들 가족의 텐트등이 놓여 있고 중간 중간 경찰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경북궁 너머로 청와대 조차도 희뿌연 먼지가 앞을 가린다.
미대사관 앞, 역사박물관을 거쳐 시민열린마당 가기전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게이트윈타워의 건물이다.
그곳 Microsoft 건물이다.
다시 발길은 안국동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운현궁이다.
운현궁(雲峴宮)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지명인 구름재에서 이름을 따와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운현궁은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雲峴宮)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수직사 (守直舍)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노안당 (老安堂)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다. 노안은 『논어』가운데 "노자(老者)를 안지(安之) 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 1) 3월에 상량하고, 같은 해에 완공하였다.
명성왕후의 부대부인 생신 축하 방문 모습
일반적으로 왕비는 궐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부모의 생신, 병문안, 상(喪)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 사가를 방문할 수 있었다.
명성왕후가 부대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여 세자를 데리고 운현궁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명성왕후는 당의를 착용하고 부대부인은 평상복인 치마, 저고리에 마고자를 착용하고 있다.
세자는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사규삼을 착용하였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착용하였다.
노락당 (老樂堂)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노락당 낙성식 때 고종과 대왕대비가 참여했을 뿐 아니라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가례를 치른 곳으로서 이 건물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일반 사대부가의 건축물에는 사당, 사랑채, 안채, 별채가 있는데 운현궁에는 건물이 한 채 더 있다.
안채 이로당(二老堂)과 사랑채 노안당 사이에 있는 노락당(老樂堂)이다.
1864년에 지은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 건물로 원래 안채였는데,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의 가례를 치른 뒤 고종이 방문할 때 사용하는 거처가 되었다.
그리고 1869년에 따로 이로당을 지어 안채로 사용했다. 이로당 뒤편으로는 별채인 영로당(永老堂)이, 운현 언덕에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노락당에 전시되어 있는 ‘낙성식 축하 다례연’과 ‘명성황후의 부대부인 생신 축하 방문’의 모형은 노락당이 왕실 가족이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당 (二老堂)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이고,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채다.
원래 운현궁의 안채는 노락당이었으나 노락당에서 고종의 가례를 치른 후, 이로당을 짓고 안채로 사용했다고 한다.
유물전시관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전시하여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말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공간이다.
전시공간은 18개로 세분화되어 있으며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가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예복, 운현궁의 각종 생활유물 등을 전시하였다.
현재 이곳에 전시되는 유물은 복제품이고, 실물은 서울 역사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조선시대 왕족·정치가.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대원군에 봉해졌다.
그 뒤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양전편고(兩銓便攷)》 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 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崔益鉉)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淸)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 아들 재면(載冕)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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