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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210922 추석연휴 ------------------경주 산책

by 명산 김승곤 2021. 9. 23.

추석연휴..........
일찌기 경주라도 다녀오자 그리 되었다.
더구더나 저녁 근무고  해서 .....
집에서 08시 30분 쯤 나섰다.
가을 답게 연휴답게 길거리는 쏟아져 나온 차량들, 그리고 행락객들..
경주 월정교 주차장이다.
오늘은 주차비를 받지 않는다며 바리게이트를 올려 놓았다.

월정교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던 교량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4월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복원하였다.
월정교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월성에서 보는 첨성대

석빙고다.
보물 제66호로 지정 되어 있다.
1738년(영조 14) 부윤 조명겸(趙明謙)이 목조의 빙고를 석조로 축조하였다가 4년 뒤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는 빙고 입구 이맛돌에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고 새겨진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월성이다.
둘레 2,400m. 사적 제16호.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안의 건물지가 있다.
이 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한다는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동궁과 월지 가는길

첨성대 가는길

베고니아

첨성대다.
국보 제31호다.
신라 시대에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 관측대라고 한다.
과학적이면서도 신비함이 가득한 건축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기도 한곳이다.

황리단길

경주시 사정동과 황남동에 위치한 좁은 도로이다. 
낡은 옛건물에 한옥으로 생긴 식당과 커피점, 사진관, 술집,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유명해지고 젊은이들의 유동 인구가 주말이나 휴일에는 아주 많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條)에 보면, 왕은 계정에서 태어났고 왕비 알영은 계룡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이라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9년 3월 밤, 왕이 금성의 서쪽 시림 가운데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살펴보게 했다.
신하가 가보니 금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자 왕은 날이 밝는 대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해 열어보니 속에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은 이를 기뻐하며 아이 이름을 알지라 부르고, 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고 했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계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내물왕 릉
신라의 제17대 왕. 성은 김(金)씨다.
356년 흘해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내물마립간대에 와서 신라는 고대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더욱 강화되어 내물은 남당에서 주재하는 최고통치자로 군림했다. 
3성(姓)이 교대로 왕이 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재위중 중국의 문화가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오기 시작하여 비로소 한자가 사용된 듯하다. 
처음으로 중국사료에 나타나는 신라 왕이기도 하다.

경주향교

경주 최부자댁
1700년경에 건립된 경주 최씨의 종가로,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원래는 99칸이었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었는데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12대를 내려오는 동안 지켜진 여섯 가지 가훈으로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가 있다고 하는데
최 부잣집 1년 쌀 생산량은 약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집안에서 쓰고, 1,000석은 손님에게 베풀고 나머지 1,000석은 주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 덕분에 최 부잣집은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자댁 안채

최부자댁 사랑채

둔차
재주다 둔하다는 뜻이다.
최준공의부친인 최현식공의 아호라 한다.
둔한2등이라 직역하면 1등만 강조하는 현대사회의 경종을 울리는 문구다.

대우헌 
크게 어리석다라는 표현이다.
최준공의 조부인 최만희공의  아호라 한다.
사리사욕을 따지지 않은 공적인 헌신을 강조한말이라 한다

용암고택
용의 정기가 스며 드는집 이라는 소리다.
최진립장군의 후손인 최기영호를 따서 지은잡이라 한다.

뒷채

경주 법주는 경주지방의 전통 가양주로서 경주시 교동의 일명 경주 최부자네 집안에서만 이어져 내려온 법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86-3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경주의 만석꾼 최씨네 집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에게만 전수시켜온 독특한 술로 연한 갈색의 감미로운 맛과 향기, 마시고 난 뒤의 깨끗한 뒤끝으로 정평이 나 있다.
궁중술이라고도 부르며 최씨네 선대가 궁중 내 간장·된장 등 염장을 감독하는 사옹원의 관리로 있으면서 임금이 마시는 곡주의 제조법을 집안에 전승시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재료로는 찹쌀, 밀누룩, 집뜰의 우물물이 쓰이며, 최씨네 집안의 뛰어난 물맛이 술의 질을 좌우했다고 한다.
제조 방법은 먼저 술쌀의 1/10에 해당되는 찹쌀죽을 쑤어서 누룩과 배합, 5~10일 발효시킨 후 모주를 만들고, 여기에다가 다시 쪄서 말린 찹쌀 고두밥을 배합시킨다.
그뒤 숙성과정을 거쳐 100일 정도가 지나면 법주가 된다.

교촌마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국학이 세워졌던 곳인데 고려시대의 향학, 조선시대 향교로 명맥이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교촌에는 신라 원효대사,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교촌마을에는 국가민속문화재 경주 최부자댁, 중요무형문화재 경주교동법주가 있다

월정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