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4개국 투어
투어 : 인천-이탈리아(바티칸시국)-스위스-프랑스(모나코)-영국-인천
일시 : 2018년 4월 18일~4월 30일
인원 : 25명
● 2018년 4월27일----------------------------------
○ 파리/KYRIAD LE BOURGET CENTRE 출발(09:00)
○ 노틀담 대성당(10:30)
○ 개선문 (Triumphal Arch)
○ 베르사이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 (13:00)
○ 에펠탑/Eiffel Tower (19:00)
○ 세느강 유람선투어(21:00)
○ 파리/KYRIAD LE BOURGET CENTRE (23:00)
파리가 현대의 모습이 갖춰진 것은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1821)와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1808~1873)의 도시 개축 작업 때문이라 한다.
나폴레옹 1세는 마들렌성당을 건설하고 콩코르드광장을 재정비했으며 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와 에투알광장을 연결했으며. 그리고 1805년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개선문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생명을 불어 넣은 사람은 나폴레옹 3세라고한다.
1850년대 나폴레옹 3세는 조르주 오스만 남작의 설계를 받아들여 파리시를 전면적으로 재단장하기로 하는데.....
이때 생미셀 대로에서 세바스토폴 대로에 이르는 도로가 닦였고 시테섬의 건물들이 재건축되었으며 샤틀레광장의 모습도 바뀌었다고 한다.
특히 도시 전체를 조그만 구로 나눠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주요 간선도로들이 도시를 관통하게 되었다고 한다.
1855년부터 거의 11년마다 한 번씩 열린 파리세계박람회는 파리의 이미지를 완전히 다르게 변모시켰다고 한다.
박람회 때마다 새로운 궁전이 지어졌고 도시구획이 정비되었으며. 1878년에는 샤요궁전,1937년에는 시립근대미술관과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1889년 파리세계박람회때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대혁명 100주년과 세계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대형 철탑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구설수에 휘말리게되었는데 이는 높이 300미터에 달하는 대형 철탑이 프랑스의 국력과 발달된 토목기술을 세계에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기념비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발표하게 되는데....
이는 중세시대부터 고고하게 지켜온 고풍과는 전혀 어울리지 읺는 그런 발쵸 였다고 한다.
그때당시 철은 경제적 진보라고 여겼지만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 철로 만든 괴물이 고풍스럽고 조화로운 파리 풍경을 훼손시킬 것이 틀림없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1881년 토목기사 세빌로가 300미터짜리 탑의 건설계획을 가지고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시작되는데 돌로 만든 태양탑 형태에 거대한 서치라이트를 부착해 밤의 파리를 비춘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1884년에는 에펠사의 토목기사 모리스 케클랭(Maurice Koechlin)과 에밀 누기에(Emile Nouguier)가 300미터 높이의 탑을 설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자유의 여신상 구조물을 계산했다고 한다
이때는 1889년의 세계박람회 개최가 아직 결정되기 전이었는데 그런데 당대 최고의 건축토목가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이 케클렝의 아이디어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에펠은 케클랭과 누기에와 공동으로 특허등록을 했다.
특허명은 300미터 이상 높이 탑의 금속 받침기둥과 금속 탑문(塔門)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라는것이다.
1884년 프랑스 정부는 1889년 파리세계박람회 개최를 발표했고 박람회를 위한 건축 공모전을 열었다.
19세기의 기술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인상적으로 상징할 기념물을 표현해줄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물론 에펠은 공모에 당선되었다
검색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서 ...............
하지만 박람회를 위해 철탑을 세운다고 하자 파리 사람들은 예술의 도시 파리를 망가뜨린다며 에펠에게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5~6층 높이의 낮은 석조건물에 익숙한 파리 사람들에게 철로 만든 괴물은 노트르담대성당에 대한 수치, 고전주의 법칙과의 비극적인 단절, 건축 예술에 대한 죄악이었다는 항의였다고한다.
1만 5000개의 강철 조각과 105만 846개의 못이 사용되었고 총 7300톤의 철이 소요되었다으며 엄밀한 구조계산으로 시속 180킬로미터의 바람을 받을 때에도 맨 꼭대기가 흔들리는 폭이 불과 12센티미터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300명의 인원으로 2년 6개월만인 1889년 5월 15일 세계박람회 일정에 정확하게 맞춰 에펠탑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입장권 매표를 위해..........
그리고 에펠탑은 세 군데에 전망 테라스가 있어 파리세계박람회에서 단연 최고의 인기를 끌었으며 200만 명이 에펠탑에 몰렸다고 한다.
파리를 망가뜨린다는 비난은 탑이 완성되자 찬사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에디슨은 에펠탑을 위대한 아이디어의 현장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에펠은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국기가 300미터의 깃대 위에서 펄럭이는 유일한 나라입니다.라고....
전망대에서......트로카데로 정원(Jardins du Trocadéro)와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
샹드 마르스 광장 Champ de Mars
마르스 광장이라함은 군사 훈련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어로 샹(champ)은 샹드리제의 샹과 같은 말로 들판을 의미하며 마르스는 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신(神)을 가리킨다고 한다.
따라서 샹드 마르스란 전쟁의 신인 마르스의 들판이란 뜻이다.
이 마르스 광장의 남동쪽 끝에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가 있는데 원래는 1750년 루이 15세가 가난한 귀족 자녀들을 장교로 양성하기 위해 왕립군사학교로 건설한 것이라고한다.
이 공사는 1752년부터 시작했고 정식 개교는 1760년이었다.
광장도 1760년대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이 학교 출신인데 샹드 마르스는 바로 이 군사학교의 연병장이자 군사 훈련을 하던 곳이라 한다.
때문에 전쟁의 신(神)인 마르스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 학교의 연병장은 지금은 공원이 됐지만 건물은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로 지금까지 건재하다.
하지만 이 샹드 마르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지 2년째인 1791년 7월 17일, 이 곳에서 군중들이 모여 루이 16세의 폐위를 주장했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당시 시장이었던
장 실뱅 바이이가 계엄을 선포하고 라파예트가 발포명령을 내려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일어났으며,1794년에는 국민의회가 선언한 국가종교제전의 무대가 되었고
1867년, 1878년, 1889년과 1900년, 1937년에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한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트로카데로 정원(Jardins du Trocadéro)와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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