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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220724 밀양 투어

by 명산 김승곤 2022. 7. 25.

밀양 투어

 

일시 : 2022년 7월 24일
동무 : 김용근님부부, 하진수님 부부, 김승곤 부부
일정 : 10:50/밀양연꽃 단지
      : 12:10/퇴로리 고택
      : 12:50/밀양 황포 진주냉면/ 
      : 13:30/영남루
      : 14:30/용평터널
      : 15:00/시례호박소및 쇠점골

지난주 용근형님 전화다.
열굴이나 한번 보자며
그리고 저녁 먹자는 이야기이다.
지난 7월달 정기산행도 가지 못하고 해서 보고 싶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이다 싶다.
뭐 그리 바쁜곳도 없지만 백수가 선뜻 나서려니 그렇고 한게 오늘 내일 하다 그리 되었던 것 같다.
하여 어제 저녁 일정을 카톡으로 올렸다.
간김에......
간김에 둘렀다 오자 그리 되었다.
투어도 하고 트레킹도 하고 그리고 저녁도 먹고....
하루지만 빡시게 돌아다니자는 그런 계산이다.
더구더나 울산에서 가까운 곳이라 가능할것 같은 장소만 골랐다.
하지만 문제는 더위와 싸움이다.
마치 일요일 새벽 내린비로 더위는 잠시 누구려 들겠지만 그 습도는 어쩌겠나 싶다.

7월 24일.....
용근형님...
처제를 울산역에 태워다 주는길에 진수형님 태워 왔다.
그리고 좁지만 같이 가자며 우리집까지....
그렇게 운전대는 당연 내가.....
먼저 밀양 연꽃단지로 가기로 하는데 요즘 연극제 까지 하는데 시간이 맞질 않아 연극관람은 다음으로 미루고.....ㅎㅎ
가산리 마을회관앞에 주차를 한다.

밀양연꽃 단지는
밀양연극촌과 상생효과를 높이고 관광객들에게는 관찰과 체험을 할수 있는 교육 문화 체험정으로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38필지.....
한국에서 연꽃을 처음 재배한 것은 세조 9년(1463), 관료이자 학자인 강희맹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부터라고 한다. 
당시 강희맹은 명나라의 옛 수도인 남경에 방문하여 전당지 라는 연못에서 전당연의 씨앗을 갖고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 부근에서 시험재배에 성공하면서부터이다.

7~8월달이 연꽃을 관람하기에 알맞은 시기이긴 하지만 올해는 조금 일찍 피웠는지 연자가 대부분이다.
연자는 
연꽃의 씨앗을 말한다.
연씨, 연밥, 또는 연자(蓮子)라고 부른다. 
식용으로 먹을 수도 있지만 껍질에서 떫은 맛이 나기 때문에 까는데, 껍질 깐 연밥을 한약재로 사용할 때에는 연자육(蓮子肉)이라고 부른다. 
말린 것을 그냥 먹기도 하며 과거에는 간식 삼아서도 먹었다. 
그리고 연자죽이라고 해서 연밥을 갈아서 죽처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연밥으로 염주를 만들어 사용하면 공덕이 크다 하여 연밥 염주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중국 고전에서는 강남 소주, 항주 지방에서 특히 많이 자생하여 그 고장 아이들이 연밥과 능실(마름 열매)을 따며 노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고.....

가산 저수지
안내판에는 밀양시 부북면에 위치한 가산 저수지는 위양못 바로 옆에 위치한 규모가 큰  저수지로 유명 하다는 내용
그리고 저수지 주변으로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주말드라이브 코스로 손색이 없다는 내용이 전부다.
둑위로 올라선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 오는게 큰호수와 그안에 설치한 태양열 발전장치이다.
쓸모없는 호수이 이런거 참 바람직스런 현상이라 생각하면서 그늘를 찾아 보따리를 풀어 일용할 양삭을 꺼집어 놓는다.
잠시후 
점심식사하러 갈 예정이지만 견물생심이 딱 맞는 말이다.
다음은 퇴로 마을이다.
네비를 마춰 가지만 농로길은 먹히질 않는다
그러니 큰길을 찾아 갈수밖에.... 

가산 저수지에서 보는 부북면

퇴로마을
가산 저수지에서 금방이다.
퇴로 마을은 밀양 부북면 퇴로리에 위치한 퇴로리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건립된 여주 이씨 종택을 비롯해 여러 채의 고택이 있어 문화재적 가치와 더불어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전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퇴로리 고가마을 골목을 걷다 보면 진흙을 발라 낮게 조성한 토담과 빛바랜 아청색의 기와가 흘러간 세월의 무게를 잘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토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어디든 걸어도 고요하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여주 이씨 고가는 배우 강부자 주연의 영화 ‘오구' 촬영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퇴로 마을을 나와 식사하러 가는 길에 위양지를 잠시 둘러 차창 관광이다.
내년 5월 이팝나무가 피는날 오기로 하고....

신촌오거리주변 진주황포냉면집이다.
비빔냉,물냉, 이두가지를 섞어 특미로 나눠 있다.
펑가는 각각이지만 물냉이 담백하다는 이야기이고 비빔냉은 달다는 그런평이다.
특미..........
이맛 저맛도 아니다.
그져 평범한 냉면.....맛 
10분을 달려 영남루 주차장에 도착하는데 떼약볕이 무섭다.
후문을 통해 영남루로 들어 선다.
오른쪽에 천진궁이라는 .... 
그리고 그 앞쪽에 영남루가 자리하고 있다.

천진궁
1665년 건립했다고....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의 부속건물로 사용 되었으나 1722년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보관하며 객사의 기능을 담당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헌병대가 이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했다고...

남쪽으로 중앙에 단군의 영장과 위패를
그 왼쪽에 부여 고구려 가야 시조의 왕과 고려 태조 위패를..
오른쪽벽에는 신라와 백제의 시조왕과 발해 고왕 조선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1957년 대대적 수리와 함께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을 만덕문이라 하였다 했다.

영남루
신라 경덕왕때 이곳에 세워졌던 영남사를 폐사되고 흔적만 남게 되자 고려 공민왕때 당시 밀양 군수 김주가 신축하여 절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
그리고 자료를 보면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조선시대의 밀양군 객사(客舍)였던 밀양관(密陽館)의 부속건물로서 밀양 강가의 절벽 위에 위치한다. 
건물 기둥이 높고 사이를 넓게 잡아 웅대하다. 
좌우의 부속건물들과는 층계로 된 월랑(月廊)과 헌랑(軒廊)으로 연결하여 건물 전체 배치에 변화를 주었으며 규모도 더 커졌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렸고,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으며 연회를 베풀기에 알맞은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표현한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내부 둘레의 고주(高柱) 위에 이중량(二重樑)을 짜고, 외부 둘레의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 충량은 용신(龍身)을 조각하였다.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창건 연대는 고려 말이라고 하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헌종 때 불탄 것을 2년 후인 1844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밀양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자연 에어콘바람이 분다.
시원하기 이를데 없으니 오는사람들 마다 어따 시원하다.
그러면서 드러 눕거나 앉아 정담을 나누는데...
경상도 특유의 발음이 억센지라 그전 소음 수준이다.
아니 싸움 수준이다.
잠시 휴삭을 가지는 동안 혼자 무봉사를 다녀오기로 한다.

무봉사
통도사 말사이다.
773년 법조선사가 영남사를 순례하다 큰 봉황새가 이곳으로 날아들어와  상서로운 자리라 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범율국사가 하얀고를 하면서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절이름을 무봉사라 하였다 한다.

대웅전에는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을 봉안 했는데 보물 493호이다.
높는 97cm로 대좌와 광배가 없는채로 영남사에 계시던걸 근처에서 출토된 굉배와 대좌를 맞춰 무봉사에 모셨다는 이야기이다.
약사전이다.
희미하지만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듯한 모습
그리고 오른손에 향마촉지닌 수인을 들고 있는듯 하여 약사여래불로 생각한다고..
마모시기가 너무심해 조성연대를 알수 없다고 한다.

태국나비 전설
왕건이 고려를 건국 하기전 어느날 봄이 아닌데도 태극문양의 날개가 달린 니비떼가 시방에서 날아와 영남루 일대 아동산을 뒤덮었다.
나라가 혼란스런 시절이라 사람들은 태극나비가 길조일지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곧 고려가 건국대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고  그후에도 가끔 태극나비가 나타나면 나라에 
경사스런일이 샹겨 고려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국성집이라고 부르게 하였다한다.
그리고 
태극나비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1945년 8.15광복때 아동산 중턱에 있는 무봉사에서 연달아 출현 했고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1954년 4월 태극나비를 우표로 제작했다고...

진해 천자봉과 무봉사창건주 법조선사의 전설
진해 천자봉은 명나라와 조선의 전자가 태워날 명당이라하여 천자봉이라 했다고...
이는 무봉사와 관련 있다고 한다.
신라 혜공왕때 법조 선사가밀양 무봉암을 창건할 당시의 일이다.
선사가 밤중에 뒷간을 가는데 호랑이 한마리가 뒷간을 지키고 있어 다른곳에 가서 용무를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 밤에도 뒷산을 가는데 호랑이가 앉아 있는것을 보고 화가난 선사는 지팡이로 호랑이의 머리를 내리쳤는데 덤벼들줄 알았던 호랑이는 사라지고 대신 흰나비 한마리가 날아 올랐다고 한다.
이에 그 선사는 흰나비를 따라 나섰는데 나비는 새벽녁에 어떤 산봉우리에 가서 앉았다가 다시 산아래로 날아가  어떤집으로 돌아가는것이었다.
마치
그집에는 슬하에 자식이 없는 쉰살전후의 부부가 있었는데 지난밤 똑같은 내용의 이상한 꿈을 꾸었고 날이 밝자 꿈이야기를 하며 서로 괴이하게 생각을 하던차 마치 선사가 힌나비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는것이다.

두사람의 끔은 간밤에 선사가 겪은 흰나비와도 관련이 있는 꿈이었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모일모시에 다시 한번 이곳에 찾아 주인장에게 청할일이 있으니 그때 가서 소승의 청을 절대로 거절하지 마십시요라며 다짐을 받으며 돌아 갔다는것이다.

이에 주인부부는 도통한 선사의말이라 거절할수 없어 승낙하였고 
열달이 지난 어느날 부인이 해산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약속한 날짜에 선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액이 있어 집에 있으면 머지않아 죽게 된다며 소승이 데려가 길러야 하니 맡겨달라는 청이었다.
주인부부는 예전에 했던 약속도 있고 하여 
또 머지 않아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워 났다 하고 
하여 선사의 말에 아이를 건너주었고 
선사를따라간 아이는 절에서 공부하며 열심히 무예를 닸았는데 보통 아이와 달리 매우 총명하고 용맹이 뛰어 났지만 특이하게도 왼손주먹을 꼭 쥐고 있는 버릇이 있어 밖에 나가거나 놀때나 잘때나 주먹을 펴지 않았다 한다.
어느날 
선사는 아이가 잠든 틈을 이용
왼손 주먹을 펴보고는 깜짝 놀라는데...
아이의 손금에는 임금왕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아이는 벌떡 일으나 왼손으로 선사의 따귀를 후려치고는 
에잇 중놈아 
내 여태 감추고 있던 비밀을 네놈이 눈치를 챘구나라며 이곳을 떠날수밖에 하며 절간을 뛰쳐나가 행방이 묘연 했더고 한다.
이에 뒷날
이 아이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되었고 
그런 연유로 천자봉이 생겼다는  전설이다.

사명대사 비각

다음 일정을 소화 하자며 일행과 함께 다음 투어에 나선다.
용평터널이라 한다.
뭐 주소가 용평동이라 하여 용평터널이라는...
하지만 백송터널, 월연터널로도 알려져 있다.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당시 사용했던 철도 터널로 이용되다 1940년 경부선 복선화로 설로가 이설되면서 일반도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
폭 3m, 길이 130m이며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영화 똥개의 촬영지라고

시례호박소 주차장이다.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지만 순환이 비교적 잘된다.
그러니......
쇠점골 트레킹이다.
터멀까지는 가지 못하겠지만 적으도 형제폭포까지는 다녀와야 하기에....
편도 약 3km 길이다.
길이 좋아 마음 편하게 걸을수 있는 그런길.....
그러니 이런 저런 이아기를 해도 금방이다.
형제폭포 윗쪽 계곡에 앉아 발도 닦고 일용할 양식도 챙기고....
그리고 돌아 선다.

시례호박소이다.
밀양팔경중 하나로 
시례 호박소는 해발 885m의 백운산 자락 계곡에 위치하며, 화강암 위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자료다.
백옥(白玉)같은 화강암이 억겁의 세월동안 물에 씻겨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하여 호박소 또는 구연(淵)이라 한다고....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갔을 만큼 깊었다고 하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는데...
오랜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재미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다.
이무기가 승천하지 못하고, 이곳 호박소에 잠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옛날 그 골짜기에 이미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찌나 영특한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였다. 
하루는 제자가 저녁에 오줌 누러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자 스승은 허락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는데 도중에 깨어 일어나 보니, 제자는 돌아와 있지 않았고 이런 일이 며칠 계속되자, 스승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뒤를 밟아보기로 하였다.
스승이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제자는 또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뒤를 밟아보니 마을에 있는 연못(沼)으로 가더니, 곧 물에 들어가 노는 것이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 제자는 사람이 아니고 이무기였고, 한참을 물 속에서 놀다가 나와 다시 사람으로 둔갑하자, 스승은 급히 돌아와 자는 척하였다.
잠시 후 제자가 돌아와 슬그머니 옆에 누워 자는데, 몸을 만져보니 몸이 매우 싸늘하였다.
마침 마을은 무척 가물었는데, 스승은 그 제자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비가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간청하자, 선생은 제자를 불러서
백성들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데, 비 좀 내리게 할 수 없느냐고 물었고, 제자는 그런 재주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다 선생은 네가 무슨 재주가 있는지 밝히지 않아도 되니, 비만 내리게 해 달라고 계속 제자를 재촉하였고, 스승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비를 내리게 하였다.
사실 이 제자는 옥황상제가 오년간 수양하라는 명을 내린 이무기였는데, 비를 내리게 하자 옥황상제는 저승사자를 내려보냈다. 
스승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는 이미기라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고, 스승은 뒷산에 이미기라는 나무가 있다고 대답하니, 갑자기 그 나무에 벼락이 치고는
날씨가 다시 맑아지는 것이었다.
그 후 아무도제자를 보지 못했는데, 승천을 못해서 시례 호박소로 들어간 것이라고 하고, 가끔 스승이 소(沼)를 찾아가면 이무기가 눈물을 흘리더란 이야기가 전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어째튼 하루 일정은 마치고 동부 숯불갈비집으로 지를 옮긴다.
그리고 하루 일정을 마감하고 오후부터 핕빙수이야기를 입에 달고있는 형님을 위해 뚜레쥬르로 옮겨 옛날 팥빙수와 함께 허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