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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200923 월정교및 교촌마을

by 명산 김승곤 2020. 9. 23.

월정교

원효대사가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전하는 경주의 월정교지는 통일신라시대 월정교 옛터이다.
이때에 원효대사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요?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무열왕은 그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대사를 보내도록 한다.
원효대사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혹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지니,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고,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60년 경덕왕(景德王 19) 때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일정교(日淨橋), 월정교(月淨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었던 일정교는 월정교의 동쪽으로 약 700m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월정교(月淨橋)는 조선시대에 와서 월정교(月精橋, 淨->精)로 표기되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길이 60.57m의 월정교 아래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편이 출토되어, 교각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센 물살에 견디도록 교각을 배모양으로 쌓았다.
요석궁은 월정교터를 건너면 나오는 마을터에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 경주 최부자집터로 바뀐 뒤에 현재는 음식점 등이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월정교 아래를 흐르는 문천(蚊川)에서는 지금도 고둥 등을 줍는 아낙들이 있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정교

주차장 들어 가는 길목이다.

주차장 들어 가는 길목 즉 오른쪽 이다.

주차장 들어 가는 게이트이다.

아직은 요금은 받지 않는다.(2020년9월 23일)

주차장

월정교

강건너 교촌마을

월정교 모습

월정교 입구

월정교

월정교 내부의 모습

언젠가 유명했다던  교리김밥이 옮겼다는 안내판이다.

조선시대의 흔적을 품은 경주교동 최씨고택이다.
경주 최부잣집으로 더 유명한 공간이다.
청송 심부자와 함께 영남 만석꾼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은 300여년 간 12대를 이어간 부자로도 유명하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경주 최씨의 종가, 경주 최부잣집이 위치한 공간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기거했던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알려진다.
1700년경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12대에 걸쳐 300여 년간 부를 유지했다.
아흔아홉 칸으로 지어졌으나 1970년 사랑채와 별당이 불에 타 버렸다.
그래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에서 여러 대에 걸쳐 빚어온 경주 교동법주를 비롯해 경주 향교, 2013년 1월 가오픈한 경주 교촌마을 등이 근처에 자리한다.
교동은 최부잣집뿐 아니라 신라의 국학과 고려, 조선의 향교를 품은 공간으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의 중심지였다.


경주 최부잣집에 들어서면 먼저 최부잣집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는 ‘육훈(六訓)’이 눈에 띈다.

삼대가 가기 어렵다는 부자가 12대를 이어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오죽했으면 최부잣집 소작농이 되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을까.
그들은 대를 이어 가훈을 지키며 부를 쌓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런데 어째서 최부자는 12대로 막을 내렸을까. 잠시 전해지는 최부잣집 이야기를 들어보자.

 

최부자의 1대는 최진립이다.
2대 최동량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큰 땅을 구입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국선은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쌀을 빌려간 것을 못 갚자 아들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없애고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준다.
배고픈 보릿고개 때에는 100석의 쌀을 베푼다.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최부잣집의 선행 덕분이었을까.
활빈당의 불길 속에서도 최부잣집은 살아남는다.
하지만 12대 최준에 이르러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신념으로 독립자금 마련에 재산을 내놓는다.
광복 후에는 교육 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
최부자가 12대, 300여 년으로 막을 내린 이유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최부잣집

경주 최부잣집 안채 아흔아홉칸이다.

곳간

육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경주 최부자집 작은 쌀통

지난번 화재로 인한 사랑채 공사중

경주  법주

교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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