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산악계에서는 엄홍길 박영석 대장 만큼이나 유명한 전국의 대표 '나 홀로 산꾼' 120여명이 지난 18일 궂은 날씨 속에서도 영남알프스 억새산행을 즐겼다. 사진은 산행을 마친 후 배내고개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의 모습.
- '나 홀로 산꾼들', 가을바람에 실려 신불산 정상에 모이다
-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혼자 산 오르는데 익숙한 산꾼들
- '한 번 모여 산행하자' 의기투합, 하루 날 잡아 10년째 1일 산행
- 新산경표 저자 박성태 씨 부산 원로산악인 최남준 씨 등
- 내로라하는 120명 영남알프스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흩어져…
이리 저리 춤추는 짙은 운무를 몰고 다니는 한 줄기 바람. 가을 바람이다. 살갗을 스치는 기운이 서늘하다.
가을 아침이면 생각나는 것이 영남알프스의 억새군락이다. 아직 덜 핀 가을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신불산 억새가 거대한 파도인 양 출렁인다. 영남알프스 하늘금을 가득 채운 억새는 춤을 추면서 "바람아 더 세게 불어다오"라고 한껏 외치는 듯하다.
일요일인 지난 18일 '신불산 바람신'이 억새와 어울려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고 있는 거대한 산상고원 오솔길을 따라 이른 아침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한 무리의 산꾼들이 있었다. 짧게 봐야 40대 중반, 좀 길게 보면 70대 초반에 이르는 산꾼들은 서로에게 질새라 어깨를 견주며 내달린다. 억새가 흔들리는 이유가 순수한 가을 바람 때문일텐데 얼핏 보면 바람처럼 빠른 이들의 걸음걸이를 피해 스스로 길을 열어주는 듯한 모양새다.
줄잡아 100명도 넘어 보이는 이들의 말소리를 들어보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가 적절히 섞여있고, 서울 경기지역의 억양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 가시거리 10m도 되지 않는 짙은 구름 속에서 '영남의 허파'라고 불리는 영남알프스 산줄기를 비호처럼 빠르게 통과하고 있는 이들의 정체는 바로 전국에서 모인 '나 홀로 산꾼'들이었다. 산을 좀 탄다고 하는 대부분의 산꾼들이 한 두개 씩의 산악회 모임이나 조직에 소속돼서 산행을 즐기는 것과 달리 이들은 저마다의 취향과 능력, 기분에 맞춰 나 홀로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영남알프스 신불산 억새평원. 국제신문 DB |
그렇다고 생판 초보 산꾼들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 어떻게 말하면 비록 아마추어 산꾼이기는 하지만
'산꾼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저명인사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마추어 산행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카페의 산행기 게시판 등을 통해 비록 닉네임(별명)으로만 알려졌다 하더라도 "누구, 누구"하면 "아하 그 분"이라고 금새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개성 있는 산행법으로 전국의 수많은 산을 누비고 다니면서 자신의 산행 경험과 느낌, 정보들을 인터넷 공간의 카페나 개인 블로그, 미니 홈피 등을 통해 공유하기를 즐기는 사람들.
그렇다면 어느 조직에 속하기 싫어하고 저마다 내로라 하는 베테랑 '나 홀로 산꾼'들이 가을이 한창인 이 시절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떼를 지어 영남알프스를 달리고 있을까. 우선 이들은 "앞으로 또 다시 우리가 모여서 영남알프스를 함께 산행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 것이다. 혹시, 다른 산에서라면 몰라도…"라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가 더욱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들이 산행을 마무리 한 배내고개 산장 앞에 내걸린 현수막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이들이 함께 모인 이유를 짐작해 볼 수는 있겠다. '영남알프스 억새 말아먹기, 2011 전국 산사람 영남알프스 모임'이라는 글씨가 뚜렷하다. 억새를 말아먹다니? 억새가 무슨 가락국수던가?
이들은 '닉네임'은 익히 들어서 알지만 얼굴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 적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산을 좋아한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 만으로 금새 친구가 된다. 이렇게 어우러진 산친구들은 바람처럼 함께 달리고, 간단한 정리 행사를 겸해 사이좋게 비빔밥 한그릇 씩 나눠 먹은 후 서로 "언젠가 어느 산에서 또 뵐 날이 있겠지요. 건강하시고 안전산행 하소서"라는 인사를 나누며 바람처럼 자신의 둥지로 돌아갔다.
이들이 모인 진짜 이유? 뭐 대단할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의외로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유는 간단한데 모인 면면들이 대단해서 행사 자체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 오고, 바람 불고, 구름 잔뜩 낀 날 영남알프스에서 펼쳐진 나 홀로 산꾼들의 산행 이야기. 그 속으로 한 번 들어가서 그 이유를 들어보자.
9월 18일 비가 내릴 것이라는 당초 일기예보와 달리 영남알프스의 깊은 속살을 숨기고 있는 배내계곡의 지류인 청수골 입구는 비교적 쾌청했다. 새벽 6시가 조금 안 된 이른 시각, 서울 인천 수원 등 수도권의 '나 홀로 산꾼' 50여명을 태운 관광버스 한 대가 들어섰다. 한 두명씩 차례로 내려서자 미리 와 있던 전국의 산꾼 수십명이 "어서 오시라"며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서도 서로 서로 누군가를 열심히 찾는 듯한 눈빛들을 쏘아보낸다. 혹시 산행 중에 만났던 '그 사람'이 왔는지 찾는 것이다.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지만 간혹 아는 얼굴을 만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한 미소를 주고 받는다. 이제 인터넷 공간에서는 저마다의 유명세를 자랑하는 아마추어 '나홀로 산꾼' 120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미리 예고된 산행 계획에 따라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충분한 준비운동을 한 후 산행에 나선다. A팀은 청수우골을 따라 올라 영축산을 거친 후 신불산 간월재 간월산 배내봉을 거쳐 배내고개까지 가는 코스를 따르게 된다. 도상거리 13㎞ 정도 된다. 또 B팀은 그보다 거리가 조금 짧은 코스, 즉 청수좌골로 진입해 단조성을 거쳐 신불재에 오른 후 배내고개까지 갈 예정이다. 10㎞정도의 산행거리다. 모두가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 이상 이 땅의 산줄기를 누빈 베테랑 산꾼이다보니 움직임 하나하나가 일사불란하고 깔끔하다. 당초 일기예보와 달리 출발지에서 만큼은 쾌청했던 까닭에 산꾼들의 표정이 더없이 밝다. 물론 1시간도 안돼 영남알프스 전역이 비구름에 휩싸여 하루 종일 구름 속을 달릴 수 밖에 없게 됐지만, 이들은 그래도 별 상관없다는 반응들이다. 참가자 대부분이 1대간(백두대간) 9정맥을 완주했고 그 외 개별 산행도 1000회 이상 한 소위 고수(高手)들이 즐비하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일년에 단 하루, 10년 째 모이는 팔도 산행 고수들
간월재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노장 산꾼 '초은(왼쪽)'님과 '맨발'님. |
이날 행사의 공식 명칭은 '영남알프스 억새 말아먹기, 2011 전국 산사람 영남알프스 모임'이다. 다소 특이한 명칭이기는 한데, 한 산꾼은 "하하하, 말아먹는다고 하니까 진짜 말아먹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돼요. 그냥 산꾼들이 흔히 하는 일종의 비유어라고 이해하면 되요. '저 산을 말아먹자'고 한다면 그것은 '저 산을 원없이 제대로 타보자'는 뜻이거든"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특정 산악회나 조직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비록 조금 고독하더라도 자유롭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산행을 즐기는 이 사람들이 모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조직적인 산행은 싫어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정 만큼 소중한 것도 없다는 것을 산행을 통해 알게 된 '나 홀로 산꾼'들이 누가 먼저랄것 없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들은 현재는 인터넷 홈페이지나 게시판, 개인 블로그 등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이전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PC통신 시대부터 산행정보를 공유하기위해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웹이나 통신 공간 속에서 접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면서 이심전심으로 "우리 이러지 말고 1년에 단 하루 정도는 함께 모여서 얼굴도 보고 산행도 하고 막걸리도 한 잔 나누며 삽시다"라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 모임을 가진 것이 지난 2001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가야산에 모인 산꾼들은 '전국 산사람 가야산 말아먹기'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을 붙이고 서로의 얼굴을 비로소 확인하고 산이라는 공통 소재를 놓고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팔공산 말아먹기, 계룡산 말아먹기, 속리산 말아먹기 등의 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산 사랑 지극한 아마추어 대표 산꾼들 총집합
우리 산을 주로 다니는 웬만한 아마추어 산꾼들에게는 허영호 엄홍길 박영석 김창호 김재수 오은선 대장 등 전문 산악인 못지 않은 지명도를 가진 산꾼들이 몇 명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신산경표의 저자로 유명한 서울 산꾼 박성태 씨다. 1943년생으로 올해 만 68세인 박 씨는 공무원과 세무사를 거쳤지만 산행에 매료돼 홀로 백두대간과 크고 작은 정맥 지맥 등을 산행하면서 반평생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왜곡되거나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뀌고 산맥 개념으로 변형돼버린 우리 산줄기를 보듬고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급기야 조선 후기 여암 신경준(1712~1781년) 선생이 편찬한 '우리 땅 산줄기의 족보'라 불리는 산경표(山經表)를 보완한 신산경표를 발간해 일약 관심을 끌기도 했다. 산악전문 매거진인 '월간 산' 등에 지속적인 기고를 하는 한편 '두발로 읽은 산경표(http://user.chollian.net/~park56eh/index2.htm)'라는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잘못된 기존의 산줄기 개념을 바로잡는데 정열을 바친 인물이다. 아마추어 산악계에서 원로가 된 그가 이번 산행에 참가했다. '21세기의 김정호'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그이지만 이날은 그저 여러명의 '나 홀로 산꾼' 중 1명으로 영남알프스를 찾았을 뿐이다.
그와 절친한 지인으로서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에게 마음 속 산벗 역할을 하는 부산의 60대 원로 산악인 최남준 씨도 참가했다. 1990년대 중반 국제신문의 인기 코너인 '근교산' 시리즈 제2대 산행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최 씨는 본명보다 '준·희'라는 닉네임으로 전국 산꾼들에게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산꾼들 사이에서는 "산행 중 하얀색 '준·희' 푯말을 못 본 사람이라면 그는 국립공원만 다녔거나 산꾼이라고 거짓말하는 사람이다"는 말이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다. 그만큼 전국 팔도 어느 산줄기를 가더라도 그가 정성들여 부착해 놓은 푯말을 발견할 수 있다. 1대간9정맥 완주는 물론이고 지맥까지 100여개나 주파한 그는 특히 영남알프스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 근교산 산행대장을 역임하면서 처음으로 영남알프스 종주 코스를 답사,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오늘날 이 코스가 전국 산꾼들에게 사랑받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또 이날 120명이 오른 산행 들머리인 청수좌골과 청수우골이라는 명칭도 그가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최 씨는 "사실 오늘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야말로 쟁쟁한 초고수들인데 내 이야기 제발 하지마오"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는 또 "그래도 앞으로 영남알프스에서는 이런 모임을 다시는 갖기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오늘의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 소중하고 고마워. 모두가 '산'이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살아가는 벗이요 친구들이지"라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는다.
"맨발산악회 리본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외국 산꾼이거나 아예 산에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주인공인 부산의 윤상대 씨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고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그 역시 본명 보다는 '맨발산악회'라는 닉네임으로 더 알려져 있다. 부산 울산 경상남북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거의 모든 산에 그의 주황색 '맨발' 리본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숱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런데 간혹 그를 맨발산악회라는 별도의 산악동호회 회장으로 오해하는 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는 맨발산악회는 회원 없는 1인 산악회다. 따라서 회장도 총무도 회원도 산행대장도 윤씨 한 명이 다 하는 셈이다. 그저 혼자서 다니지만 리본 이름만 그렇게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 산행을 하기 위해서는 독도법에 정통해야 함은 물론이고 현대식 장비인 위성지리정보시스템(GPS)에도 정통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에 연구를 많이 한 윤 씨는 영남권 산꾼들 가운데 GPS 활용에 있어서는 거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산꾼들 사이에서 원로로 통하는 이들 외에도 모 대형건설사 사장까지 역임한 후 뒤늦게 산에 입문, 백두대간과 9개 정맥을 모두 주파하는 노익장을 과시한 올해 72세의 '초은' 선생도 참가했다. 또 여류 아마추어 산악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태백 신선' 여사, 초창기 이 모임의 사실상의 산파역을 한 것으로 알려진 대구 출신의 서울 산꾼 '광인'님, 서울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하면서 산에 푹 빠져 사는 것으로 유명한 '밤도깨비'님 등 이루 열거하기조차 버겁다.
■회비빔밥 한그릇 씩 나눠먹고 바람처럼 흩어지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비구름 자욱한 날씨 속에 1000m급 봉우리만 3개를 넘어야 하는 산행이 힘겹기도 할텐데 여기 산사람들은 누구 하나 지친 기색 내비치는 이가 없다. 다만 작은 아쉬운 점은 너무 짧은 가시거리 탓에 가을 영남알프스의 자랑인 억새군락의 군무를 시원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단 1명도 빠짐 없이 이미 이 능선을 탄 경력이 있기에 아쉬움보다는 얼굴이 궁금했던 산꾼들과 함께 만나서 보조 맞춰 걸을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A팀과 B팀이 모두 모인 곳은 배내고개의 새로 지은 산장 건물 앞. 이번 모임의 현장 준비를 맡은 울산의 산꾼들이 천막과 현수막 먹을거리 등을 준비해놓고 손님들을 맞았다. 간간이 뿌려대는 가랑비와 짙은 구름 때문에 뒷풀이 장소를 급히 산장 안으로 옮기느라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산꾼들이 실내에 삼삼오오 모여서 울산팀이 정성껏 준비한 회비빔밥을 한 그릇씩 먹으면서 이날 산행과 관련된 이야기는 물론이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울산의 'ⓘ영남알프스'회원들과 함께 이번 모임 준비를 맡은 김승곤 씨는 "날씨 탓에 영남알프스의 억새를 원껏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렇게 일년에 단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또 어디서 보게 될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지만 회자정리라는 말처럼 만나면 헤어지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자. 건강과 안전산행을 빈다"고 인사말을 했다. 심 회장의 인사말을 끝으로 산꾼들은 아쉬운 마음만을 남겨둔 채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바람처럼 흩어졌다. 언젠가 어느 산에서든지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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